믿음이 있더라도, 행위가 뒤따르지 않는 사람은 구원받을 수 있을까?
성경에는 우리의 선한 행위를 강조하는 부분이 많이 등장한다. 믿음은 곧 행위를 수반하게 하는 것은 사실이다. 성령의 열매는 내가 열심히 무엇인가를 하려고 할 때 나오는 결과물이 아니라, 성령님께 의지하며 살아갈 때 자연스레 나오게 되는 현상들이다.
갈5:22-23 성령의 열매
5:22 |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
5:23 |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
예수님은 자신을 포도 나무라 하였고, 우리는 가지라 하였다.
요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가지는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이다. 가지가 내가 열심히 노력해서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 그렇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행위의 유무에 따라 구원의 확인이 결정된다 생각할까? 그것은 다음과 같은 성경 구절들 때문이다.
열처녀의 비유
천국 비유 중에 10명의 처녀들이 신랑이 오는 것을 기다리는 이야기가 있다. 즉, 10명의 처녀 모두 예수님이 오시는 것을 믿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기름을 준비한 5명의 처녀는 구원을 얻었고 (잔치에 참여), 그렇지 못한 5명은 잔치에 참여하지 못했다는 표현이 나온다. 과연 그렇다면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기름이 등에서 떨어지지 않게 우리가 계속 노력해서 등의 불이 꺼지지 않는 헌신을 강요한 것이 진짜 의미일까? 성경은 이를 정확하게 말하고 있다.
마태복음 25장 3절 -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즉, 잔치에 들어가지 못했던 처녀 5명은 처음부터 기름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기름이 떨어져서 잔치에 들어가지 못했다라 성경은 말하고 있지 않다. 애초부터 기름이 없었다는 사실을 쉽게 간과한다. 즉, 예수이신 신랑을 제대로 믿지 않아서 벌어진 일이라는 것이다. 이 구절은 우리의 행위를 강요하기 보다, 우리의 본질인 믿음, 그리고 우리가 믿고 있는 대상이 누구인지 정확하 알아야 한다는 구절에 더 가깝다. 예수를 안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닌, 우리의 믿음의 고백이 그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5명의 처녀도 신랑이 오는 것은 알고 있었다고 성경은 분명히 이야기 하고 있다.
25:5 |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
이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10명 모두 다 졸었다고 한다. 기름을 준비한 5명의 처녀는 눈 똥그랗게 신랑을 반겼다고 하지 않는다. 10명다 졸았다. 이 천국 비유는 헌신과 준비를 강요하기 보다, 미련하고 슬기로운 자의 차이, 즉 예수를 정확히 알고 있느냐가 핵심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을 살면서 예수를 믿지만, 조금 졸아도 괜찮다. 우리의 연약함으로 인해 예수를 십자가에 계속 못받는 일들이 매일 일어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기억하여야 할 것은 그래도 신랑이신 예수가 오실 때 5명의 처녀는 졸았어도 함께 잔치에 참석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달란트의 비유
5달란트와 2달란트를 받아서 불렸던 하인들은 주인이 돌아왔을 때, 칭찬을 받았다. 하지만 1달란트 받았던 하인은 주인이 돌아왔을 때 혼이 났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모든 하인들은 (1달란트를 받은 하인 포함) 주인이 돌아올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즉, 1달란트 받은 자도 주인이 분명히 온다는 것을 알았다. 간혹,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나서 행위가 없는 사람들의 비유를 1달란트 받은 자로 연관하여, 믿음이 있어도, 행위가 없으면 버림받을 수 있다라고 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이 성경구절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행위 없는 믿음을 깨우치기 위함이 아니다. 1달란트 받은 자 역시 “애초에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던 처녀”와 같이 제대로 믿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것을 분명히 성경에서는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다.
마태복음 25장 26절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즉, 하인은 주인을 전혀 알지 못했고 자기만의 허상으로 주인을 이해하고 있었다 것이다. 성경에는 달란트를 남기지 못했기 때문에 주인이 화가 났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 주인을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이라 말하고 있다. 이것이 진정한 달란트의 비유이다. 헌신을 열심히 해서 주인에게 더 유익한 사람이 되자가 아니다. 주인을 정확히 알고 믿자가 핵심이다.
예수를 구주로 안믿는 사람들도 예수를 알고 있다. 예수님 당시에도 예수라는 이름을 들어본 자는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 중 누가 과연 믿음으로 예수를 영접하였는가? 그것은 우리가 천국에 가서 알 수 있을 듯하다.
요한이 말하고 있는 이기는 자란 누구인가? 열심히 헌신하는 사람을 뜻하는가?
요한계시록 2장 11절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이 성경 구절에서 믿는자가 구원을 받는다고 하지 않고, 이기는 자에게 구원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음)있다고 말하고 있다. 요한이 정말 여기서 믿음을 이기는 자로 바꾸려고 했을까? 이겨야지만, 구원이 우리에게 있다 라고 말하려고 하는가? 요한복음을 시작으로 요한이 집필한 성경에는 큰 흐름이 있다. 그것은 예수가 인성과 신성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이며,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이 있다라는 것이다. 그런데 왜 뚱딴지 같이 갑자기 이기는 자 (즉 행위를 강조하였을까?)를 강조하였을까? 여기서 이긴다는 것은 내 힘과 헌신, 의지로 이긴다는 의미가 아니다.
로마서 8장 37절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사무엘하 8장 6절
다윗이 다메섹 아람에 수비대를 두매 아람 사람이 다윗의 종이 되어 조공을 바치니라.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
우리가 이 땅에서 싸우는 모든 영적 싸움들은 내 힘으로 이기는 것이 아니다. 우리를 사랑하는 예수로 인해 우리가 이기는 것이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전쟁 병법은 아주 단순했다. “하나님 우리가 가서 싸울까요? 말까요?” 이것 하나였다. 여리고 성을 함락하기 위해서 그들은 전쟁을 준비하지 않았다. 그냥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성을 삥삥 돌았을 뿐이다. 그들의 전쟁 지략은 단순했고, 그것은 그들을 항상 이기게 하였다.
그러면 우리의 의지와 헌신은 전혀 필요치 않는가?
축구장의 비유를 들어보자. 축구를 전혀 알지 못하고, 할줄도 모르는 나를 전방 포워더 자리에 딱 서게 만든다. 저 뒤 멀리서 예수님이 멋지게 다른 적군들을 따돌리고 센터링을 해서 가만 서있는 내 머리에 정확히 맞춰서 골을 만든다. 그리고 그 분은 와서 나에게 말한다. 너 정말 축구를 잘하는구나? 본인이 다 해놓고서 우리에게 영광을 나눠준다.
우리의 헌신과 열심은 이 땅에서 축구장에 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은 멀리서 달려오시는 예수님만 의지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해야할 이 땅에서 가장 중요한 열심이다. 즉, 그분이 모든 것을 이기게 한다는 믿음이다. 그리스도를 위한 헌신을 과소평가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헌신과 의지,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것은 내가 축구장에 서있는 자체만으로도 예수님은 그분의 영광을 우리와 나누시며 우리를 넉넉히 이기게 하신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렇다면 분명 헌신은 내가 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나오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열매들이다.
이 포스팅은 한몸교회 이수용 목사의 설교를 나의 버전으로 재해석 했음을 알려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