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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워싱턴 리뷰어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인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슨 의미인가?


참된 자기 사랑



1. 자기 사랑의 기초: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일


마16:24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이 구절로 인해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을 형편없는 존재, 매번 죄에 빠져 있는 사람, 자기를 비하하는 경향이 있다.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은 자기 자신을 혐오하라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분명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고, 우리를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희생을 치루었다. 그렇기에 우리 자신을 더 존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필요하다. 



예수를 알기 전의 우리의 모습을 성경은 아래와 같이 표현하고 있다. 



엡2:1-3 "여러분도 전에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때에 여러분은 허물과 죄 가운데에서 이 세상의 풍조에 따라 살고 공중의 권세를 잡은 통치자 곧 지금 불순종의 자식들 가운데서 작용하는 영을 따라 살았습니다. 우리도 모두 전에는 그들 가운데에서 육신의 정욕대로 살고 육신과 마음이 원하는 대로 행했으며 나머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날 때부터 진로의 자식이었습니다."



이 세상의 풍조를 따른 다는 것은 더 많이 가져야하고, 더 편리한 삶을 누려야 하며, 남을 짓누르고 올라가는 것이다. 육신의 정욕은 내가 나의 주인이 되어서 나의 편리와 안위함에 집중한 삶을 사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을 성경은 진로의 자식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도 우리는 이전의 삶의 형태를 바로 바꾸기는 어렵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보낼때, 우리의 새로운 신분에 의거해서 옛것들을 버려야 한다고 고린도 성도들에게 당부하고 있다. 



우리가 우리의 행동과 생각을 마음대로 하는 것 같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우리의 삶의 주도권을 우리가 쥐고 있지 않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가운데서 작용하는 영을 따라 살았습니다) 즉, 내가 현재 원하고 바라는 것이 사실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인지 생각해보면 된다. 만약 내가 사과를 하나 먹고 싶다는 생각을 해서 하나를 먹었다고 가정하자. 사과를 먹음으로써 나는 만족감과 배부름을 경험할 수 있다. 하지만, 내 옆에 친구가 사과를 10개 가지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나는 갑자기 상대적 빈곤을 느끼게 될 수 있고, 이로 인해서 자존감과 열등감까지 느낄 수 있다. 우리에게는 얼마나 많은 사과가 우리 주위에 존재하는가? 남들보다 좋은 직장, 멋진 자동차, 고급 주택, 멋진 이성, 공부잘하는 옆집 아이들 등등 너무 많은 것들이 우리의 시선과 마음을 사로잡는다. 즉 우리의 삶의 주도권이란 결국 상대적이라는 결과에 도달하게 된다. 이때 우리가 믿음으로 반응하지 않으면 우리의 삶은 더 비참하게 될 것은 분명하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자기 사랑이란 이런 것이 아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는 우리에게 능력이 없었고, 이러한 세상의 소리에 어떻게 대응할지 몰랐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삶에서는 이러한 것들을 따라 살 수 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이제 이러한 세상을 따라 살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얻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후 받은 것은 구원 하나만이 아니다.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고, 내 자신을 향하여 당당하고 용기있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우리에게 주셨다. 그리고 이것이 진정한 자기 사랑의 법칙이 되는 것이다. 



2. 믿음: 자신에게 이루어진 축복 받아들이기


간혹 "아직도 내가 덜 죽어서요" 라는 표현을 한다. 이렇게 말할 때, 칭의의 의미에서는 틀린 말이지만, 성화의 과정에서는 맞는 말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위에서의 희생은 그 어떤 죄도 깨끗이 한다. 이를 성경에서는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죄까지 포함한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는 과거의 자기 모습을 부인해야 한다. 하지만, 이는 우리의 건강한 욕구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축복들을 다 내려놓으라는 말이 아니다.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아무 생각 없이 (혹은 생각을 했다 해도 세상의 풍조에 따라) 추구했던 것에서 대해서는 다시 생각해봐야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따라 살아가는 삶 가운데에서는 순종이라는 열매가 자동으로 맺히기 마련인데, 이는 분명 세상의 풍조와 같지 않기 때문이다. 




3. 변화된 신분에 걸맞은 삶으로 이끄시는 성령님


훈련소에 입대한 훈련병은 전투 능력과 경험이 없어도 군인이다. 신분의 변화는 내가 인식하든, 하지 못하든 관계가 없다. 미국 시민권을 받게 되는 순간, 영어가 완벽하든 그렇지 않든 관계없이 신분의 변화가 생긴다. 시민권을 받은 사람은 그 나라에서 받을 수 있는 혜택과 권리를 자연스레 누릴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난 후의 우리의 모습은 어떨까? 많은 경우 아직도 옛 습관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그대로 일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러한 겉모습과 속사람에 관계없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은혜를 통해 믿음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우리의 신분의 변화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또한 기독교는 다른 일반 종교와 달리 수양을 통해서 혹은 착한 마음과 선행으로 구원에 이르는 종교가 아니다. 자신의 수양의 깊이와 노력으로 깨달음에 도달하는 종교도 아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성화의 과정은 무엇인가를 이루려는 과정이 아니다. 단순히 그 분의 사랑에 내가 반하여, 나를 그와 같이 닮아가려는 과정이다. 이때 이 성화의 과정을 우리와 함께 가는 분이 계시는 데 그 분이 바로 성령님이다. 



갈2:20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살고 있는 삶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성화의 과정 가운데는 분명 우리가 넘어지는 단계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이라는 것을 구하기 위해서 성화의 과정을 가는 것이 아니다. 그 목표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단번에 우리를 대신해서 이루셨다는 것을 기억하자. 성화의 과정은 우리의 전인격적인 반응이며, 사랑으로 인한 순종이다.



갈5:24 "그리스도 예수께 속한 사람은 정욕과 욕망과 함께 자기의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이 성화의 과정에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을 의지하며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풍성한 삶을 누리며 살아가길 소망해야 한다. 보혜사 성령님이란 무슨 뜻일까? 보혜사란 변호해주시고, 도와주시는 분이라는 뜻이다. 



4. 우리 속에서 경험하는 두 가지 욕망


훈련소에 입소한 훈련병은 미리 정해진 규율에 따라 생활하는 방법에 대해서 바로 적응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로 인해서 죄사함을 받았지만, 아직까지 우리는 우리의 옛적 모습을 바로 버릴 수 없다. 그것은 아주 당연한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알기 전까지 수십년을 우리의 육체의 소욕에 따라 반응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옛적 모습은 그렇다면 어떤 모습이었을까? 성경은 이를 아래와 같이 표현하고 있다. 



갈5:19-21 "육체의 행실은 환히 드러난 것들입니다. 곧 음행과 더러움과 방탕과 우상숭배와 마술과 원수 맺음과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분쟁과 분열과 파당과 질투와 술 취함과 흥청망청함과 먹고 마시는 놀음과 그와 같은 것들입니다. 내가 전에도 여러분에게 경고하였지만 이제 또 다시 경고합니다. 이런 짓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것입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 중에도 구원의 확신이 있으니 나는 좀 놀아봐도 되겠다 하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의 근거는 구원은 이미 이루었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이것은 구원의 차원에서는 맞는 표현이지만, 성화의 차원에서는 틀린 표현이다. 사랑하는 부모님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당신은 당신이 사랑하는 부모에게 매맞지 않고, 혼나지 않을 만큼만 그 부모를 공경하며 사랑할 것인가? 아니면 이러한 한계선을 긋지 않고, 내 마음과 정성과 뜻을 다해서 부모님을 사랑할 것인가? 율법은 매맞지 않을 한계선을 긋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율법이 우리에게 근본적으로 주어진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이다. 



갈5:22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이런 것들을 막을 법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각과 행동 중에 어떠한 부분이 육체의 소욕에 해당되고 다른 부분이 성령의 이끌림인지 자세히 생각해보자. 1주일 동안 나의 생각과 행동 중 어느 쪽 영역에 속하는지 기록해보면 우리의 모습이 현재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다. 한가지는 이러한 성령의 음성에 민감해지는 훈련은 의지적으로 하지 않으면 우리는 자연스레 육체의 소욕을 따르기 마련이다. 여섯번째 만남에서는 바로 성령을 따라 사는 삶에 대해서 나눌 것이다. 




이 포스팅은 김형국 목사의 풍성한 삶의 기초 (비아토르)의 책과 이수용 목사의 일대일 제자 양육을 참조하였음을 알려드린다.



다음 만남 (여섯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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